경제

나주 스리랑카 노동자 지게차 사건에 E-9 비자 주목ILO “사업장 변경 제한된 비자 구조, 강제노동 유발”미국, 태평염전 소금 ‘강제노동 제품’ 지정…수입 전면 금지


23일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가 공개한 영상 중 일부. 이달 초 전남 나주 소재 한 벽돌공장에서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가 비닐로 벽돌더미에 묶인 후 지게차로 옮겨지고 있다.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 제공]
23일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가 공개한 영상 중 일부. 이달 초 전남 나주 소재 한 벽돌공장에서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가 비닐로 벽돌더미에 묶인 후 지게차로 옮겨지고 있다.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 제공]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사업장이 싫어도 못 나갑니다. 사장 허락 없인요.”

전남 나주의 한 벽돌 공장에서 스리랑카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지게차에 결박돼 조롱당한 영상으로 파문이 일고 있다. 노동계는 사업장 이동을 제한한 E-9 비자가 빚어낸 예고된 비극이라고 진단했다. 노동자 인권 문제가 수출 제한 등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문제의 벽돌 공장 외국인 노동자는 고용허가제(E-9 비자)를 통해 입국한 비전문 외국인 노동자다. E-9 비자는 한국 내 농축산, 제조, 어업, 건설 등 이른바 3D 업종의 인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2004년 도입된 제도다.

25일 통계청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E-9 비자 외국인 노동자는 약 30만2000명으로 1년 전보다 12.6% 증가하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통계를 보면 ▷2022년 23만4000명 ▷2023년 26만8000명 ▷2024년 30만2000명으로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제조업·농축산업·건설업·어업 등 이른바 3D 업종에서 일하고 있으나, 가족 동반은 불가하고 언어·문화 적응 지원도 부족한 상태다. 무엇보다도 이들에게는 사업장을 이동할 자유가 없다. 고용부는 ▷임금체불 ▷폭행 등 사업주의 명백한 귀책 사유가 있을 경우 ▷휴업·폐업 ▷산업재해 등 예외적 상황에 한해 사업장 변경을 허용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이런 사유를 입증하기 어렵고 절차도 까다롭다.

나주 사건 피해자가 반복되는 인권 침해에도 이직을 하지 못한 이유다. 문제의 나주 벽돌공장은 고용허가제 사업장 자격을 박탈 당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유사한 사건은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주노동팀장 최정규 변호사는 “이런 영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그 때마다 대책은 나왔다. 그러나 바뀐 것은 없다”며 “결론은 사업장변경의 자유가 박탈된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는 이런 인권침해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장 변경이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은 사업주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며 폭력·학대가 구조화될 수 있는 기반이란 설명이다.

UN은 차별철폐협약 관련 이 문제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도 2016년 보고서에서 “사업장 변경 제한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주에 종속시켜 강제노동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고용주는 체류 자격에 영향력을 미쳐선 안 된다”는 원칙도 명시했다. 그러나 한국은 ILO의 이주노동자 보호 핵심협약인 제97호(이주노동자 대우 협약), 제143호(권리보호 협약)를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반면 선진국 다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직장이동권’을 보장하고 있다. 캐나다는 일정 기간 경과 후 고용주 승인 없이도 이직이 가능하고, 미국 H-2A(농장 비자) 등도 고용 종료 후 타 사업장 이동을 허용한다. 독일은 노조 가입과 이직을 제도화해 명시적으로 보장한다. ILO에 따르면 이주노동자 대우 협약을 담은 제97호 협약은 전 세계 53개국, 제143호는 약 30개국이 비준한 상태다.

노동자 인권 문제는 한국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상황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실제 지난 4월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은 국내 최대 규모의 태평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에 대해 “장애인 강제노동을 통해 생산됐다”며 수입 금지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다. “협박, 이동 제한, 임금 유보 등 ILO의 강제노동 지표가 확인됐다”는 조사 결과가 그 근거였다.

태평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 대미 수출분은 연간 7∼8톤(1억원 상당)으로 그 규모가 많진 않지만, 이로 인해 미국 시장에서 한국산 천일염은 ‘강제노동’ 오명을 뒤집어썼다. 산업통상자원부·해양수산부 등이 나서 “현재 생산된 제품은 강제노동과 무관하다”며 대응에 나섰지만, 이미 CBP의 ‘인도보류명령(WRO)’이 발동된 상황에서 수입 재개는 강제노동 무관성 입증 없이는 어려운 상태다.

fact0514@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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